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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예전에도 그러했지만 앞으로도 만약 누군가가 홍콩 연예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절대 빼 놓을 수 없는 한사람이 있다. 연예계의 큰언니, 여장부, 백변, 카멜레온, 요녀,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 파워 풀한 가창력, 수 만 관중을 압도하는 무대매너, 강렬한 눈빛.. 그녀를 수식하는 말은 그녀의 화려함 만큼 다양하고 셀 수 없을 만큼 많지만, 그녀를 표현하기엔 턱없이 모자를 만큼, 언어에는 한계를 느낀다. 항상 너무나도 화려하게 빛나는 무대위에 항상 화려한 변신을 하는 그녀이지만, 만약 그녀의 본래 모습은 여느 여인과 다를 바가 없이 아름다운 사랑과 가정과 아이들을 꿈꾸고, 자기 자신과 친구들을 사랑했었던, 웃기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고, 남을 위해 묵묵히 봉사하길 좋아했던, 정말 평범했던 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아마 믿지 못하겠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21년 동안 연예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했고 그 수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그녀의 삶은, 아니 실은 무대위에서 시작하고 또 보내고, 그 무대를 마지막으로 삼았던 그녀의 한 평생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고통과 아픔 그리고 기쁨이 함께 했을 것이다.

매화(매) 고울(염) 꽃다울(방) 梅 艶 芳, 혹은 Anita Mui Yim Fong, Mei Yan Fang, 
한국 신문에선 메이옌팡 또는 무이 임퐁, 우리들은 梅姐(무이찌에-매언니) 혹은 阿梅(아매). 언제나 그리운 그 이름 매염방. 그녀의 이름 석자는 지금 그 가치를 측정할 수 없을 정도의
대단한 것 이지만 그녀가 지금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고된 나날이 뒷받침이 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모든 후배들이 가장 열망하는 이름이다. 그녀는 [호금전]시대의 연예인 즉 그들의 아주 오랜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연예인의 기본인 가창력 연기력등을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익히며 자랐고 아시아 최고의 스타가 되었다. 순간 반짝하고 사라져 버리는 요즈음에 수많은 연예인과는 분명 다른, 도제가 장인이 되듯 자신의 걷는 길에 전문가가 된 그녀, 높은 태양 같은 그녀의 모습은 아주 어린시절 부터 가꾸어져 왔다. 물론 그 연륜도 있겠지만 그녀의 모습, 그것은 분명 그 무엇도 대체 할 수 없는 그녀 내면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끼]의 영향이다.

그녀는 1963년 10월 10일 오후, 홍콩에서 태어났고, 광서성 합포가 본적으로 대다수의 홍콩인들이 중화민국건립 이후 본토에서 일어난 문화혁명을 피해 홍콩으로 밀려 들어왔고 매염방 일가도 이 시기에 홍콩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매염방은 그녀의 어머니 [단미금] 여사가 40세에 낳은 늦둥이인데다 유복녀라는 결코 좋지 못한 조건에서 태어났다. 그녀를 기다리것은 가난과 힘겨움였고, 막내로 태어났지만 막내로써의 특권을 누릴 수 없었던 것이 당연했으며 어린 나이에 이미 조숙해졌다. 어린 그녀에게 삶은 결코 쉽지 않았고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환경에 적응하여 가족의 생계를 이끌어야만 했던 것이다. 당시 그녀의 어머니는 전통 話劇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계셨고 늘 그녀를 데리고 다 니셨다. 그녀가 4살이 되던 해 화극을 가르치고 배우는 모습을 보고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노래를 불렀을 때 주위 사람들은 매우 놀랄 수밖에 없었다. 4살의 어린 아이가 어려운 고곡을 음정하나 틀리지 않고 해냈다는 것이다. 어린 딸에게 노래에 재능이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하셨던 어머니에게 그녀의 재능이 처음 발견되어진 6개월 후, 4살 반이 되었을 때 어린 매염방은 처음으로 그녀의 어머니가 일하시는 [東方劇院]에서 처음으로 대중 앞에 서게 되고, 당시 관객은 30명 정도 였고, 무대 첫 데뷔 곡은 [장미 아가씨]라는 전통 화극 곡이었다. 매염방의 노래 인생은 그녀가 6살이 되던 해부터 활짝 피기 시작한다. 그녀는 [張雲]선생님의 가르침으로 노래의 참 의미와 그 맛을 알 게 된 것이었다.

그녀의 프로필(프로필 등은 백변 공식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에서 보았듯이 아매의 학력은 높지 않다. 오히려 낮다 할수 있다. 항상 그것을 아쉬워 하는 그녀이지만 자신의 과거를 한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당당한 매염방이다. 그녀는 14살 여름, 학교를 그만두기까지 약2년에 걸쳐 중학교를 다녔고, 정말 재미없는 학창시절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학교 선생님은 물론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밤거리를 전전하며 노래하고 손님을 끄는 그녀를 보고 선 반드시 나쁜아이로 자랄 것이라는 우려를 했다. 그들의 그런 염려 아닌 염려를 들은 그녀는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하였다.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아이라고 손가락질 받을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 했고 그 맹세를 지켰다. 이 어린시절의 맹세는 사춘기의 어려운 시기를 지날 때에도 그 역할을 제대로 발휘해 그녀를 다잡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매염방의 성격은 매우 강하고 자기 주장 또한 강하다. 그래서 그녀는 중국정부를 비롯하여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연예계 마피아 세력들의 강한 제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일괄성 있게 표출 시켜왔다. 그런 그녀의 성격은 어릴 때부터 그 강함과 끈기를 다분히 들어내왔다. 지금 그녀가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는 이유에 그녀의 이런 성격이 상당히 큰 장점으로 작용해 왔다.

어린시절 학교생활 보다는 무대위에서 시간을 더 많이 보냈던 그녀에게는 누구에게나있을 죽마고우가 없다. 지금 그녀의 친구들이란 연예계 친구들이 전부이고 어린 시절 친구를 굳이 들자면 어린 강아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후에 큰오빠의 저녁 식사가 되긴 하였지만 아매가 가장 사랑했던 강아지라고 한다. 아매는 자신의 강아지를 잡아먹은데 대해서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마음 아파하고 있는 정이 많은 인물이다. 그리고 그녀의 친언니 [매애방]이 유일한 친구중 한 명이다. 어릴 때는 모든지 함께 였다고 한다. 노래도 슬픔도 즐거움도 심지어는 82년 [신수 가창대회]에 까지 함께 지원했을 정도 그들 자매사이는 돈 독하다. 언니는 탈락하고 그녀는 대상을 받게 되었지만 두 자매는 언니가 결혼하는 그 해 까지 연예계에 같이 몸담았었다. 지난 2000년 4월, 아매의 친언니는 지병인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삶에서 언니의 위치란 굉장히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녀의 가장 깊은 내면의 비밀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람, 그녀와 함께 어린시절을 보내며 함께 격어야 했던 많은 고난과 아픔,,, 그녀는 언니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언니 걱정하지마. 내가 언니의 아이들을 지켜줄꺼야. 그리고 조금만 기다려. 우리 어차피 다시 만날 거잖아... 잘가...]

촌스런 옷에 나이보다 훨씬 성숙해 보이는 얼굴, 그리고 이상하리 만치 무대에서는 것이 자연스런 18세 소녀의 출연... 그것은 홍콩음악계의 새로운 신화를 창출해내는 여진이었다. 80년대 홍콩 연예계는 아매 없이는 절대로 논할수 없다. 그만큼 아매가 가수가 된것은 어쩌면 아니 당연히 주어진 운명의 길이였다고 생각한다. 태어나는 그순간부터 하늘로 날아오르려 끊임없이 날개짓하는 독수리처럼 아매는 어머니의 태속에서부터 가수가 되는 법을 연기자가 되는 법을 본능적으로 익히게 된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홍콩 평론가들이 아매는 한세기에 한번 태어나기 힘든 연예인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것이다. 그녀가 연예계에 데뷔하게된 계기는 모두다 아시다시피 [제 1회 신수가창대회]이지만 실지로는 그녀의 언니
[매애방]이라고 할수있다. 만약 그당시에 그녀의 언니가 신수가창대회에 참가하자고 권유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그녀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신수가창대회에서 당시 인기를 누리던 가수인 [서소봉]의 [바람의 계절]이란 곡으로 3000 대 1이라는 엄청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정식으로 연예계에 데뷔를 하였다. 당시 데뷔사진을 보면 그녀가 18살이란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성숙해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가 처음 연예계에 입문하였을 때 당시에는 매염방의 출연 그 자체가 놀라운 변화였다. 여가수 하면 등려군 같은 고운 목소리에 익숙해져 있었고 발라드가 위주였던 당시에 그녀같은 저음의 목소리에 강렬한 비트를 소화해내며 화려한 댄스를 선보인 여 가수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83년 발매된 첫 앨범 [적색 매염방]이 무려 20만장 가까이 팔려 나간 것을 보면 당시 그녀의 출연이 얼마나 획기적인 일이었으며 동시에 사람들의 관심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인구가 적은 홍콩에서 20만장이면 우리나라의 200만장에 맞먹는 숫자라고 할 수 있다. 매염방이 홍콩 최고의 가수가 되기까지 그녀가 걸었던 길은 매우 어려웠지만 그녀는 개구리가 뛰어오르듯 해를 달리 할수록 그 가치와 인기를 더 해가며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어냈고 [매염방 신화]라는 새로운 단어를 창출해 냈다. 80년대 초부터 은퇴를 선언한 91년까지 홍콩에서는 모든 가요제 상을 휩쓸어버렸기에 다른 여가수들이 빛을 보지 못 할 정도였고 홍콩을 대표하는 가수로써 거의 모든 국제 무대에 섰던 것을 보면 당시 그녀의 위치를 잘알 수 있다. 그녀의 실력과 인기는 그녀의 수상내역을 보면 알 수 있다. 일일이 기재하기 어려울 정도로 홍콩을 비롯하여 각종 국제 무대에서 그 능력을 과시하며 상을 독차지 하였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1983년부터 그녀가 홍콩내의 모든 음악상 수상을 거부한 90년까지 7년에 걸친 홍콩 최우수 여가수상을 수상하였다.

뿐만 아니 라 영화제에서도 그녀가 부른 주제가는 많은 상을 받았었고 인기를 끌었고 그녀가 출연하였던 [연지구]와 [연분] 그리고 [반생연]등으로 최우수 여우주연상 혹은 조연상을 수상하였다. 그 외에도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에트 된 작품들을 이야기하자면 그녀가 출연한 거의 대부분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매년 홍콩 연예계에서는 가장 수익을 많이 올린 연예인들을 선발한다. 그녀는 여기서 홍콩 여자 연예인으로서는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 한 예를 들면 그녀가 97년 한 해 동안 콘서트와 영화출연 등의 실질적인 수득은 거의 19억원에서 20억 사이에 이르고 있다. 그녀는 영화 뿐 아니라 음악 분야에서도 아주 놀라울 정도의 기록을 세웠고 아직까지 그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1985년 25회에 걸쳐 열린 첫 번째 개인 콘서트에는 무려 40만명이라는 인파가 모였었고 홍콩인구를 감안해보면 정말 놀라울 만큼의 수 라고 하겠다. 지난 95년 오랜 기간의 휴식을 끝내고 개최한 14회의 콘서트에서 매 회당 약 9000만원이 넘는 개런티를 받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이 대형 콘서트 전에 마카오에서 열린 3회 콘서트가 전회 매진되는 홍콩 역사상 개인 가수 콘서트로는 이례가 없는 기록을 세웠다. 이 이외에도 홍콩음악계 및 영화계에 미친 영향은 실로 말로서는 표현하기 힘들 정도이다.

한 세기에 한번 태어나기가 힘들 정도의 천부적인 연예인 매염방에게 태어나면서부터 걸어와야 했던 연예인 생활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것의 해답은 그녀의 오랜 방황과 은퇴 그리고 그 번복 이라는 복잡한 인생항로에서 엿 볼 수 있다. 그녀는 분명 이 길에서 수많은 상처를 입었으며 그 상심한 마음을 감싸려 노력하였고 지금은 그 누구보다 자유롭다. 표면적으로는 누구나 가지고 싶어하는 명예와 부를 어린 나이에 이루어 낸 성공적인 모습이었으며 늘 수많은 사람들과 팬들 사이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화려한 위치에 서 있었지만 그녀는 말하고 있다. 그 자리가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동시에 얼마나 많은 희생을 그녀에게 강요하였고 빼앗아 갔음을 말이다. 모든 자신의 욕구를 억제하며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듯 늘 틀에 박힌 생활을 하며 동시에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중압감과 가족들 사이에서 격는 마찰등 이런 수많은 어려움들을 아매는 말없이 견디고 스스로 해결해 나가야했고 그러기엔 아직 그녀가 혈기 넘치는 젊은 나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지금 화려함과 자신감 그리고 태풍이 불어와도 흔들일 리 없는 강한 인물이라고 그녀에 대해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까지 강하게 되기까지는 자신을 깍고 다듬고 훈련시켜야 하는 힘든 나날이 있었다. 1987년 어느 여름날 새벽, 자신의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최후의 결정을 내리게 된다. 수십년간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며 산전 수전을 겪다 못해 공중전 까지 격어야 했던 그녀가 과연 무엇 때문에 자신의 목숨 조차 버리고 싶어 했을까... 그것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오직 그녀만이 알고 있다. 단지 자신의 스트레스를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 그녀가 자살을 기도하였던 가장 큰 원인이라고 밝혔을 뿐이었다. 자살시도는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를 발견함으로써 너무나 다행스럽게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녀는 당시 죽음을 눈 앞에 둔 시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 응급치료에 대한 반응은 생각보다 좋았다. 그리고 수 시간이 흐른 후 당초의 염려와는 달리 다시 눈을 뜨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금방 신문과 잡지의 일면에 톱 뉴스로 기재되었다. [홍콩 최고의 아이돌 스타 매염방 자살기도], 그 후 자살보다 더 길고 힘든 언론의 가쉽에 휘말렸고 그녀는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만 했고, 수많은 어려움과 눈물은 스타로써의 그녀를 얻기 위한 당연한 대가 였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 수 있었다.  1988년 그녀가 전성기를 구가 하고 있을 때 홍콩에서 발매된 [표지모델]의 동명 타이틀 곡은 아매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당시 상당한 상업적 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 곡을 들어보면 그녀가 얼마나 진정한 사랑과 우정 즉 그녀를 감싸고 있는 수많은 거짓에서부터 자유로와 지기를 원했는지 느낄 수 있다. 91년 10월 10일 7년 연속으로 홍콩에서 최우수 여가수상을 수상하였고 홍콩내의 모든 상을 그녀 혼자 독식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받던 상을 더 이상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그녀는 고별 콘서트를 통하여 연예인 활동을 전면적으로 중단함을 선언하였다. 이는 홍콩 연예계에 대단한 지각변동의 요소가 되었고 지금 활동하고 있는 많은 연예인들이 이 시기에 탄생하고 또 빛을 보게 된 것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최고의 전성기에 갑작스레 은퇴를 선언한 것에 대해 홍콩 언론은 암살 위협설 이민설등 많은 이유를 제기 하였으나 당시에 그녀는 단지 쉬고 싶은 것이 그 이유라고만 표했다. 그러나 몇 년 후 다시 연예계로 돌아오면서 당시의 입장에 대해 어느 정도 밝혔었고, 대단히 성공적인 연예계 복귀로 그동안 그녀를 그리워 했던 수 많은 팬들에게 다시 한번 그녀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매염방의 신화를 보여주었다. 그 후로도 음악, 영화, 그리고 자선에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항상 후배 양성에도 힘써 왔는데, 현재 홍콩의 인기 가수들인 그들의 뒤에서 조용히 많은 도움을 준 선배이기도 하다. 그녀의 제자가 되기를 간절히 희망했던 많은 스타들이 있었다는 얘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그녀의 제자는 아니였지만 그녀에게 도움을 받은 수많은 신인들이 있고, 그들이 현재 홍콩의 음악계를 이끌어가는 스타들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들은 그녀의 도움에 보답하기 위해 그녀의 콘서트 마다 게스트로 출현하고, 그녀를 위한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남자, 여자 모든 사람들과의 대인관계가 무척이나 좋은 여자 연예인이기도 하다. 웃기 좋아하고 남을 돕기 좋아하고, 털털하고 좋은 성격탓에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그들과의 좋은 우정을 과시하고 있다.


성숙한 한 여인으로써의 매염방... 그 모습은 정말 은은하고 아름다운 향기를 발산하는 한 송이의 꽃과도 같다. 그러나 정말 아름다운 꽃이 피기까지는 추운 겨울과 같은 어려운 나날을 보내야 하듯이 그녀는 많은 날들을 눈물과 아픔속에 흘려보냈고 그 대가로 진정한 사랑을 기다리는 한 송이의 꽃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가식과 대인관계에서 격는 가슴아픈 상처를 나름대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해결하려 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사랑이었다. 그녀의 남자 친구는 많았다. 평범한 회사원부터 스턴트맨 같은 연예인 그리고 보디가드 까지..... 자신의 공허한 마음과 한사람의 평범한 여자로 돌아 가고 싶은 욕구를 이렇게 표출하였던 것이다. 지금 그녀는 말했다. 진정한 삶과 그 삶은 누릴 때 얻을 수 있는 평범한 자유와 기쁨을 말이다. 그녀의 남자친구들에 관한 이야기들은 스캔들적인 경향이 아주 짙고 그녀 역시 이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한가지 정확한 것은 홍콩의 많은 남성 스타들이 그녀에게 청혼을 했었고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며 활동하고 있었던 20대의 이러한 청혼을 모두 거절하였다. 가장 정확하게 밝혀지고 매염방 본인도 인정한 사람은 바로 [조문탁]과 [PAUL] 이라는 남자 이다. [Paul]이라는 남자는 그녀가 80년도 후반 사랑했던 남자로써 이 남자와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결국 2년을 넘기지 못하고 헤어지고 말았는데 그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당시 주변 상황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알려 졌다. 그녀는 이 남자와의 사랑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한 남자 조문탁과의 이야기 및 그녀의 인생에 몇몇 남자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는 (백변 공식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과거 소식란이나 기타 다른 페이지에 이미 올라와 있는 상태이기에 더 이상의 언급을 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녀는 항상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싶어했다. 한 남자의 아내로, 아이들의 어머니로서의 평범한 여자가 되기를 희망했다. 결국 멋진 한 남자의 아내가, 귀여운 아이들의 어머니란 오랜 그녀의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2003년 11월. 그녀는 마지막 무대위에서 새하얀 웨딩스레스를 입고, 40년 동안 그녀의 청춘을 그녀의 모든 것을 보냈던 바로 그 무대를 남편으로 맞이하였다. 수 많은 팬들의 환호를 들으며 그녀의 그 뒷 모습은 결코 외롭지 않았다.


난 이 세상을 떠날 때 삶에 아무런 후회나
아쉬운 것이 없을 것 같아요. 단지 한 가지
내 가족을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 아쉬울 것 같군요.
여러분들은 내게 이 나이까지 가정을 꾸리지 못했으니
불행하지 않냐고 반문하겠지만,
난 나의 세계가 분명히 있고 또 나의 생활 스타일이 있고 그 안에서 만족하고 있어요. 난 다른 사람들의 이목과
말에 인생의 길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어요.
바로 홀로 있다는 것이 인생의 행복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니까요.”

「2002년 12월 동방일보 인터뷰 中」



21년을 최고의 스타로써 살아온 그녀가 가장 애지중지했던 단 한가지는 정말 너무나 단순한 그녀 개인의 삶이다. 그것은 물론 평범한 다른 사람들과는 좀 다르지만 그녀가 연예인 생활을 통해 얻은 자신만의 노하우를 적극 활용하여 개인적인 짬을 내고 그 시간을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맨 처음 이야기 했던 것 처럼 무대 밖에서의 평범한 그녀의 모습을 본 많은 사람들은 무대에서 흔히 보기 힘든 그런 의상을 입는 것에 대해 잘 적응하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뭔가 특별한 것을 먹고 특별한 행동을 하며 또 밤에는 매우 광기어린 행위들을 할 것이라고 추측하고 거기에 맞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탄생시켰었다. 그러나 그녀는 밤에는 일하고 새벽과 아침에 잠을 자고 일어나면 식사를 하고 또 일이 없을 때는 집에 와서 강아지들과 노는 그런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매염방은 밤에 요녀 일 것이다.], [광란한 밤을 즐길 것이다.] 혹은 [마약을 하는지도 모른다.], [몸에는 문신이 있다.] 등등 무성한 소문들이 그녀를 괴롭혀왔다. 이에 대해 그녀는 그런 모습은 무대에서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포장이고 장식이고 자신은 아주 평범하다고, 무대에 서기전의 모습이나 기타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어쩌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게 백변 매염방 이란 말인가.]
백변이란 칭호는 연예인으로써의 무대 위에서의 모습을 칭한 것이지 결코 그녀의 개인적인 삶을 칭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현재의 자신의 단순한 삶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 마지막까지 그렇게 얘기했다. [나는 연예인이기 전에 한 사람의 여자이고 여자이기 전에 인간이며 인간이기 전에 동물이라는 것을 나의 모든 팬들과 언론들이 알아 줬으면 한다.]고...

2003년 09월 05일, 수많은 루머에 시달리던 그녀는 자궁경부암을 앓고 있다고 기자회견을 통하여 밝혔으며 투병의 강한 의지를 보였다.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팬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웃으며 당당한 미소를 보이며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사실은 홍콩, 중국 뿐 아니라 한국에까지 그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그녀는 연예계 활동을 중단하지 않고 더욱 활발하게 하였으며 더 많은 사람들을 돕는 것에 앞장 섰다. 그리고 2003년 11월 [경전금곡 연창회]를 개최하여 세계 각국의 팬들과 성공적인 만남을 갖는다. 그 자리에 다행스럽게도 한국 가미회도 참여할 수 있었다. 누군가 그 시간은 하늘에서 그녀에게 내려준 기적이라고 한 것이 생각난다. 하지만 그 당시 그 어느 누구도 그것이 마지막 콘서트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그 무대는 그 언제보다도 화려했고 또 대단한 가창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 후 11월 말 그녀의 완치 소식은 수 많은 팬들의 가슴을 다시 한번 뜨겁게 해주었으나 12월 성탄절 파티를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매염방은 2003년 12월 30일 새벽 2시 40분 운명을 따라 먼 여행을 떠났다. 그날 그녀의 곁에는 100여명이 넘는 그녀의 친구들과 밖에는 그녀의 팬들의 기도가 함께 했다. 오랜 친구인 [성룡]은 그녀가 울지 말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아달라는 마지막 말과 아주 평화로운 미소를 띄고 있었다고 전했다. 이 소식은 전파를 타고 전 세계에 방송되었고, 그녀의 소식에 가슴아파하는 수 많은 사람들의 눈물이 있었다. 2004년 1월 그녀의 장례식엔 세계 각 국의 수 많은 팬들이 홍콩으로 찾아와, 찾아오지 못한 팬들은 TV 생중계를 지켜보며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 주었다. 한국 가미회 역시 그 자리에 있었고, 비록 우리의 모든 사랑을 다 보여주진 못했지만 가슴 속 깊이 사랑했던 그 마음을 전해주었다. 그녀는 분명 외롭지 않았고 편안히 행복한 웃음 지었을 것이라 믿는다.


21년간의 연예계 생활, 너무나도 뜨거웠고 너무나도 화려했고 너무나도 아름다웠지만 너무나도 짧았던 그녀의 40년 동안의 인생을 어떻게 표현할지는 각 각 다르겠지만,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언제 어디서나 당당함을 보여준 그녀, 그녀의 위대함은 모두 같을 것이다. 비록 이제는 우리에게 달콤한 미소을 보내주던, 장난섞인 목소리로 다가오던 그녀는 더이상 이 세상에 없지만, 시간이 지나고 우리의 모습이 그리고 세상의 모습이 변한다고 해도 그녀의 노래는 아름다웠던 한 사람. 매염방! 그녀의 모습은, 오래도록 그녀만를 향했던 우리들의 뜨거운 이 가슴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매염방. 언제까지라도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가슴 가득, 그리고 가슴 깊이 사랑합니다.

-매염방 한국 공식 팬클럽 [백변매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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